좋은 시

잠실에 가면, 李 乙 (이만재)

다솜이님 2017. 1. 12. 13:09

 

 

 

 

 

잠실에 가면

 

                                 李 乙 (이만재)

 

 

잠실에 가면 얼치기 누에고치는커녕

뽕나무 하나 없고 누에방 하나 없다

뽕잎 핑곗거리 요분질하던 뽕계집도 없고

뽕밭에서 요녀와 헤벌쭉 접문하던

변강쇠 사촌도 없다

 

삼베길삼은 아득한 전설이고

그 옛날 동구 장송골

당집도 부군당도 온데간데 없다

잠실에 가면 승전비랍시고

여진족 만주글 20행

징기스칸 몽고글 20행

한문 칠분해서체 민족의 훈장인듯

대청황제공덕비 하나 버티고 있다.

 

잠실에 가면 장승백이는 없고

바람드리 옹기막도 고래실도 없다.

꽃다울 흰비름을 기리던 집터엔

노래방, 게임방, 화상대화방, 키스방

비디오방, 복덕방, 빨래방, 복권방, 다방

그래서 러브호텔 방마다 방방거린다.

 

하지만 잠실에 가면 토막난 호수 하나 있다.

다리 밑 굵은 잉어 금빛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조동이 쩍 벌리고서

인간들이 던져주는 인스턴트과자를

고백성사하듯 받아먹고 물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잠실에 가면 누에고치는 없어도 번데기는 있다.

지하철 옆 노점상의 LPG가스 화덕 위에

외지에서 뜬금없이 팔려온

김 모락모락 나는 번데기들이

재개발 딱지 팔리듯

빤지레 주름진 채로 팔려가길 기다린다.

뽕밭 하나없는 잠실에서 ----

 

 

 

 

 

註 : * 잠실(蠶室)-누에를 치는 방, 송파(松坡)의 별칭.

*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병자호란 후에 청나라 태종이 세워놓은 비.

* 부군당(府君堂)-삼전도 하류 강언덕에 세워져 있던 당집으로 송씨(宋氏)부인(李晦의 妻)를 제사하던 곳.

* 바람드리-풍납토성(土城)

---- 이 시는 < 문저협소식 55호/ 2003, 봄호> 권두시로 발표된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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