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말한다
李 乙(본명:이만재)
하늘은 언제나 높고도 두렵다
하늘이 바다처럼 쪽빛에 물들어서 아니라
하늘이 암장처럼 무거워서 아니라
하늘이 그냥 하늘이라서 무섭다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이
누구 하나 살지 않는 하늘이
소년 내 철 모르던 시절에
혼자 몰래 손가락으로 하늘을 찍어
행여 뉘에게 들키면 어쩌나
부끄러움 탈 때, 하늘은 영판 파랬다
청년 내 혈기 차던 시절에
호언장담해 놓고서 놀란 얼굴이 되어
행여 친구가 언짢아할까
지레 심기 추스를 때, 하늘은 일순 벌겠다
장년 내 고집스런 시절에
편견이 자라나 아집이 되어
행여 시비에 휩싸일까
이념이 마주칠 때, 하늘은 그저 노랬다
노년 내 황혼기에 접어들어
옳고 그름, 높고 낮음도 동전의 앞뒤
행여 이웃 마음 상할까
눈금 없는 잣대로 웃을 때, 하늘은 이따금 하얬다
지난 세월의 주마등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결코 내가 가진 하늘은 하늘이 아니었다
결코 하늘이 하늘을 하늘하는 하늘이 아니었다.
다만 때가 되면 밥 먹듯이 해 지고 달뜨는
다만 흐린 날, 일기예보 비 오고 눈 오는
언제나 어디서나 자나 깨나 일상의 쳇바퀴였을 뿐
내 아직도 없는 그 모습을 듣지 못하고
내 아직도 없는 그 빛깔을 맡지 못하고
내 아직도 없는 그 소리 만지지 못하고
오직 눈에 보이는 하늘만 하늘로 우러러, 우러러…
정작 하늘은 하늘 너머 하늘에 하늘이 있음을 모르고
파란하늘, 붉은하늘, 노란하늘, 하얀하늘에 홀리어
정녕 허튼하늘에 홀리어 애꿎은 세월만 일식日蝕했으니
나는, 나는 더도 덜도 아닌 당달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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